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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제1장 단군역사개관(檀君歷史槪觀)-고대사개관(古代史槪觀)

우리 한민족의 생존적, 역사적 벨트(belt)는 바이칼 호수로부터 몽골초원
그리고 만주대룍과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연결된다.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만든 주범들

현금의 한국 사람들은 단군의 이름을 언급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단군신화라고 말한다. 그러면 단군의 역사를 신화라고 각인(刻印)시킨 주범들은 과연 누구일까?

우리는 이미 불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쓰인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민족의 시조를 조명하면서 떠도는 민간 전설에 맞추어 기록하여 역사적인 진실을 보지 못한 오류는 책망할 수 있어도 결코 고의적으로 우리의 역사에 흠집을 내려는 불순한 목적이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나바(稻葉岩吉)-조선 총독부 수사관(修史官)으로 조선사편수회의 간사(幹事)

이마니시(今西 龍)-한국역사 왜곡의 주범으로 일제가 파견한 어용학자(御用學者)

그러나 이러한 일연스님의 순수한 기록을 이용하여 우리의 역사를 해하려는 목적에 이용한 악질적인 사람들이 있어 이들을 고발하려 한다.
1894년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의 시라토리(白鳥庫吉)라는 자가 일본의 한국침략을 염두에 둔 군부(軍府)의 사주를 받고 엉뚱하게도 단군고(檀君考)를 썼는데, 여기에서 문제의 삼국유사를 인용하여 “단군사적(檀君史籍)은 한국 불교(佛敎)의 설화에 근거하여 가공(架空)의 선담(仙譚)을 만든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없다.”라고 하며 단군의 역사를 일개의 신화(神話)로 결론지어 버렸다.

그 후, 한국을 침략하는데 성공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국토를 영구히 점령할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1915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중추원’ 산하에 조선총독과 정무총감들의 직접 지휘 밑에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를 조직한다.

이들의 목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구한 조선의 역사를 일본의 역사보다 짧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한번 점령한 남의 나라 역사를 마구 조작하여 제나라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한민족의 족보를 말살하여 민족과 역사 그리고 강역까지 모두를 제나라로 영구 편입시키려는 술책에서 시작된 범죄행위로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들의 광기어린 역사조작 공작은 1929년에 이르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현 서울대학의 전신)에서 시라토리의 ‘단군고(檀君考)’를 공부한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하여 극에 달하게 된다.

이마니시는 한발 더 나아가 단군의 실체를 완전히 부정함은 물론이려니와 아예 단군의 조선민족과 한민족(韓種族)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마니시는 자신이 속해있는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를 편수하는 곳인데 단군은 신화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신화를 조선사에 서술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단군의 기록을 조선사에서 삭제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일제의 초대 총독 데라우찌는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전국의 도, 군 경찰서를 총동원하여 전국의 책방, 향교, 서원 그리고 의심나는 개인집들까지 샅샅이 뒤져 수십만부에 달하는 우리의 역사서를 소위 ‘불온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압수하고, 그중 그들의 역사 재창조 목적에 자료적인 이용가치가 크다고 인정되는 것은 모조리 일본으로 보내고 나머지 서적들은 모두 불태워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흉내내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였다.

이때 그들이 거두어들인 서적들 중에는 ‘규원사화’를 비롯하여 각종 단군관계의 서적들 그리고 심지어는 신채호의 ‘을지문덕’ 같은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책들도 포함돼 있었다.

박영효(朴泳孝) : 한국을 영원히 점령하려는 일제(日帝)를 도와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역을 맡고, 한국 역사의 말살을 기도한 민족의 반역자.

이완용(李完用) : 한민족 만고의 역적으로 역시 악명높은 조선사편수회의 고문.

또한 단군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미국독립사’까지 불온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조선사람은 독립의 꿈도 꿀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해 갔다. 이들의 만행이 도를 넘자 드디어 일제의 흉계를 꿰뚫어 본 몇몇 책 주인들이 책을 감추었다. 이 때문에 한국 역사서 수색작업은 처음의 계획을 넘겨 6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 후에는 이 사업을 중추원으로 넘겨 계속하도록 하였다.

1915년, 데라우찌는 총독부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하고 ‘조선반도사’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때 매국 역적 이완용과 권중현 등을 고문으로 앉히고 동경대학의 구로사카 가쯔미(黑板勝美), 중추원의 이나바(稻葉岩吉), 교토제국대학의 미우라 슈꼬(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을 지도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들 중 이마니시 류는 특별히 더 교활하여 후일 현 국립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국사학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악명 높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원시조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고, 또한 그의 정신을 후학들로 하여금 서울대학교의 전통으로 이어가게 하는데 성공한다.

일제의 3대 총독 사이또는 취임초에 일본의 중요정책들을 지시하면서 “조선인이 자신들의 역사와 정통을 알지 못하게 하고, 조선의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 역사의 위대성을 과장하고 미화하여 일본을 숭배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사이또는 1925년에 이르러 일본천황의 칙령을 얻고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승격 개편하고 총독부 직속조직으로 만들어 편수회장에 현직 정무총감을 임명한 후 일본측의 고문관 5명에 더하여 조선측에서 이완용, 권중현, 박영효, 이윤용을 선임하였다.
일제의 공작으로 편찬된 ‘조선사’는 1937년에 전 35권으로 완성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단군의 역사는 흔적도 없이 제거되고, 외세의 내침은 크게 과장하여 기술하는 등 우리 한민족은 처음부터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던 노예 민족임을 극구 강조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의지를 꺾고 영구 점령을 고착화 하는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몰상식한 행위는 그래도 그자들이 제나라를 위하여 한국병합작전의 공작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민족을 말살(抹殺)시키려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일본인들에게 충성을 바치며 그들의 하수인(下手人) 노릇을 해왔던 대표적인 친일파 이병도(李丙燾)와 신석호(申奭鎬) 등이 일본이 패망하여 쫓겨가고 조국이 광복(光復)을 성취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그들 일파는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정신(民族精神)의 지주(支柱)이신 단군의 역사를 전설적인 신화라고 부정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며 일제의 혼맥을 이어가는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단재(丹齊) 신채호(申采浩) 큰 선생

이와 같은 우리민족의 불행은 한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계승시키려고 ‘한국통사’와 ‘조선고대사고’를 저술하신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선생과 ‘조선상고사’를 쓰신 단재(丹齊) 신채호(申采浩) 선생 등이 해외에서 순사(殉死)하면서 시작되었다.

비록 한민족은 두 분의 큰 선생을 잃었으나 아직도 국내에는 몇몇 분의 명망있는 민족사학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분들은 ‘조선사 연구’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과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그리고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 교수 등인데, 이들 중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가 6.25전쟁 중 북측으로 끌려가고 마지막 남아있던 최남선마저도 피난 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재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일제의 수족 노릇을 하던 이병도와 신석호만 국사학계에 남게 되었는데, 이들 중 이병도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신석호는 명문 고려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아무런 견제세력 없이 마음대로 후진들을 양성해 냈고, 그들의 오염된 교육을 받은 후학들은 다시 한국의 교단을 장악하여 일제에 의하여 창조된 식민사관을 한국의 학생들에게 전수시켜 오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이미 일반상식으로 통하게 된 식민사관의 보급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안호상(安浩相) 박사, 임승국(林承國) 박사, 김득황(金得榥) 박사 등이 중심이 되어 ‘국사찾기협의회’를 발족시키고 곧 법원에 소송을 벌였으나 이미 골수까지 파고든 식민사관의 일반적인 상식을 뒤엎을 수 없었고, 이런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강단사학자들이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하여 강력히 단결하며 엄청난 반발을 유발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들 식민사관론자들의 발칙한 성공으로 우리민족은 선조들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잃게 되었다. 이로서 국민의 대다수는 우리 스스로를 한낱 패배주의에 빠진 열등한 민족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오늘날에 와서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포함하여 우리 선조들이 일으켜 놓았던 만주대륙의 영광된 역사를 마구 강탈해 가는데도 과연 그것이 정말 우리 조상들의 강역이었는지 의심하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우리들 속에 숨어있던 식민사관 추종자들의 쾌재가 귀에 울려 그 분함을 참을 수가 없다.

이상으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잃어버리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참고로 중국측의 기록인 ‘관자(管子)’에는 기원전 7세기경 벌써 조선(朝鮮)과의 관계를 기록한 역사적 사실이 있으며 그 밖에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산해경(山海經)’, ‘전국책(戰國策)’, ‘염철론(鹽鐵論)’을 비롯하여 소위 중국의 정사(正史)라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에도 조선의 존재가 보이고 있고 이외에도 한국측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세종실록(世宗實錄)’, ‘응제시주(應製詩註)’ 등등 조선의 역사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기록은 무수히 많다.

특히 제왕운기는 신라(新羅), 고려(高麗), 동•북부여(東•北夫餘), 남•북옥저(南•北沃沮), 예맥(濊貊) 등이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썼을 뿐 아니라 신라의 솔거는 단군의 초상화를 1000매나 그렸던 사실과 더불어 고려시기에 삼남지방의 집집마다 단군의 초상을 모시며 단군을 민족의 원시조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식민사관론자들이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는 척하며 결과적으로 노예 민족으로 규정짓는 위만조선론이나 기자조선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처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이 어째서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아직도 신화(神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48년 9월 28일에 공표된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年號)에 관한 법률에는 “대한민국의 공용(公用) 연호는 단군기원(檀君紀元)으로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은 1961년 12월 1일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서기(西紀)를 따라야 국제무역의 흐름에 발생될 수 있는 분쟁의 소지를 방지한다는 유치한 발상에 근거하여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에 공표한 대한민국 법률 제55호 국경일(國慶日)에 관한 법률에 “단군성조(檀君聖祖)의 탄생일(誕生日)인 10월 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정한다.”라고 한 것은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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