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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3218

Re: 부여백제사 또는 위사의 기술내용의 의문점
작성자 :
다물넷  (IP :112.221.23.211 )
적성일 :
2013-07-09
조회수 :
1895

답변이 늦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앞서의 공지 또는 게시판 댓글에서처럼 '대한민족통사' 통합판의 출간에 매달리는 등의 이유로 답변이 늦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질문하신 부분은 전반적으로 실라 초기 역사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데서 기인합니다. 이는 우리 역사서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점과 더불어 각 왕조가 정통성 유지를 위해 이에 위해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을 생략하거나 하는 등의 이유가 결합되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실 이런 비슷한 사례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따라서 역사학자는 사실과 사실 사이에 모순을 해소하고 진실에 접근해 가는 것이 그 본연의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순을 해소하는데는 사실과 사실(역사적 근거), 사이의 모순(추정)이 합해져 나타나게 됩니다.

다음은 다물넷의 운영자인 제가(김종수) 만몽 선생님을 대신하여 기술한 것이니 참고바랍니다.


>
>1. <부여백제사> 155 페이지에는 끝부분에 "이싸움(석탈해 족과의 싸움)은 새라블족의 참패로 끝난다. 노례이사금은 전사하고 나머지 백성들은 무라 측(석탈해 측)에 귀순하게 된다. 밝씨왕조의 새라블은 이렇게 하여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사실 역사의 기록에서는 알천전투까지의 서라벌의 전투 기록이 모두 경주 지역에 기반을 둔 서라벌(새라블)의 백제 공략 전투로 기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책에 실려 있는 지도에서처럼 전투가 일어난 위치와 시기로 볼 때 이 당시의 새라블 세력은 본문에서의 내용처럼 이동해 간 것을 나타낸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전투가 알천전투로 백제가 아닌 석탈해 세력과의 전투로 재해석 한 것입니다.(지리적 위치 등으로 볼 때)

그리고 역사적 기록으로는 노례이사금(유리이사금)이 죽은 이후 석탈해에 귀속됩니다.

신라역사에서는 박혁거세 이후 3대 유리이사금(노례)까지가 BC57~AD57년이고 4대 석탈해칸이 AD57~AD80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짜맞춘 것으로 보고,

신라사의 전투기록 등을 보고 추정하기에 실제 서라벌의 박씨 세력은 서울지역에서 이동하며 정착지를 찾아 백제쪽(풍요로운 곳이므로)을 공략하다가 결국 석탈해와 충돌하여 노례이사금이 죽고 석탈해 세력에 귀속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표현상에 귀속과 공존의 협상은 서로 모순되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기록되지 않은 추정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전투 후 협상에서라면 패전한(정착지를 찾아 이동과 전투를 반복하던 새라블 세력이 아무래도 불리한 부분이 있었겠죠) 새라블이 귀속을 전제로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다만 이는 석탈해 세력의 입장이고) 그러나 그 협상의 내용이 어찌되었든 새라블 세력의 입장에서는 공존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새라블세력은 수십년이 지나 석탈해 세력을 축출하고 다시 박씨세력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5대 파사이사금부터 8대 아달라이사금까지이죠..

이 원인으로 만몽 선생께서는 새라블 세력이 비록 작고 오랜 이동과 전투로 석탈해 세력에 패했지만, 이들이 대륙에서 망명한 집단으로 국가 경영의 노우하우를 갖추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패해 '귀속' 되었지만 실제 국가의 경영에 참여할 만큼의 세력은 되었고(석탈해의 세력도 미약하였으므로), 곧 노우하우를 발휘하여 국정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보고 있습니다.(공존으로 해석되는 부분) 그러다가 석탈해 세력을 누르고 왕조를 바꾸는데 성공한 것이죠...

절치부심하던 석씨 왕조는 '경주를 선점하고 있었는데도 귀속시킨 박씨 집단에 주도권을 빼앗겼다가' AD 184년 석탈해의 손자가 9대 이사금에 오르면서(벌휴이사금) 다시 주도권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8대 아달라이사금을 축출)

이렇게 되찾은 석씨 왕가는 다시 12대 첨해이사금때 13대로 기록되는 미추이사금(김씨 왕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14대 유례이사금에서 다시 왕위를 되찾고 17대 내물마립간 때 다시 김씨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52대까지 김씨, 그리고 53대에서 다시 박씨가 주도권을 잡아 왕위를 갖고, 55대까지 이어진 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56대에 다시 김씨가 됩니다.

이렇듯 신라는 초기에는 박씨와 석씨 세력이 팽팽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 있으며, 후에 김씨(모미추)가 정권을 잡으면서 석씨 세력이 거의 축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사는 이를 마치 한 왕조가 꾸준하게 이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고 정치와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지지세력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타나는 힘의 변화로 해석하는 것이 맞으리라 생각됩니다.

>
>2. 반면, 같은 책 236 페이지 중간부분에는 " (새라블 족은) 경주지역에 도착하여 선주세력인 큰무라(석탈해 족)와 벌인 알천전투 끝에 큰무라 족과 공존하기로 협상에 성공하여 경주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새라블의 입장에서 기술한 문장이므로 공존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서 지적하신 문장은 새라블의 패전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귀속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패전을 표현하면서 공존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표현이 혼동을 드릴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전체 문맥으로 보아 귀속되었다가 왕위를 차지할 만큼 성장한 박씨 세력을 표현하면서 부정적 단어를 선택하는 것 역시 그 진의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아무래도 문장력이 떨어지는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ㅠㅠ


>
>3. 그러나, 다음 문단에선 "석씨들은 큰무라 족들로서 경주지역을 선점하고 있었는데도 뒤늦게 도착한 밝씨 집단에게 주도권을 빼았겼다. ........... 마침내, 밝씨 아달라왕을 축출하고 석씨왕조를 일으겼다" 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
>위의 1번 항목과 2번 항목 내용을 보면, 새라블 족이 선주집단인 큰무라에 흡수되어 멸망했거나(1번항) 겨우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정도(2번항) 인데, 3번항에서는 새라블 족이 선주족인 석씨 족을 누르고 왕권을 이어가다 석씨족에게 패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순이죠.

앞서 설명한 내용을 참고로, 새라블이 큰무라에 멸망당하거나 흡수했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글로 다 표현하기가 제 실력이 달리는데, ....


당시의 국가 개념은 지금과 달라서, 각 세력들의 연합체에 가깝습니다. 즉, 밝씨를 주축으로 하는 새라블에도 여러 가문이 있고, 이들이 밝씨를 왕위에 앉혀놓는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다르게는 밝씨 가문이 가장크고 힘이 있으며, 덕망이 있어 다른 가문이 따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석씨가문도 마찬가디로 큰무라라는 집단에 석씨가문이 중심이고 다른 가문들이 이를 따르는 형태죠.(물론 성씨가 같은 친척 관계의 가문도 있습니다.)

전투의 결과 새라블 세력은 큰무라 세력과 협력하기로 합니다. 이후부터는 큰무라의 가문들과 새라블에 속한 가문들이 서로 이합집산하는 과정을 겪게 되겠죠. 당연히 배신자도...

귀속이 된 것은 새라블 세력에 속한 가문들이 밝씨 왕조를 버리고 큰무라를 이끄는 석씨를 왕(이사금)으로 인정하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각 귀족의 가문들이 뿔뿔히 흩어져 큰무라 귀족들의 노예가 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큰무라도 강력한 세력은 아니었던 것이고, 주변에 비슷한 규모의 작은 나라들이 산재하여 서로 경쟁하는 입장에서, 큰무라의 석씨 세력은 일단은 굴복시킨 새라블 세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죠. 물론 정치적 견제를 포함해서 그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새라블 세력의 정착지를 근처 충돌세력과의 경계쪽으로 정해준다거나, 비교적 황폐한 땅을 준다거나 하는 등...

새라블 세력은 패전한 입장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즉, 결론적으로 새라블은 패전은 했고, 큰무라에 귀속되었으나 자신들의 세력은 고스란히 유지한 채 조금 불리한 위치를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저력을 발휘하여 석씨 세력을 누르는데 성공하고 박씨를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한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 설명한대로 석씨 세력 역시 100여년 후에 다시 왕위를 찾습니다. 그사이 아마도 적지않은 내전 또는 정치적 암투가 있었을 것인데, 이런 부분은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학자에 따라서는 바로 이런 부분만 연구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리이사금(노례)이 죽고 탈해이사금이 올랐다고 하는데, 과연 유리이사금이 자연사했는가?, 왜 박씨가 아닌 석씨에게 왕위를 이양했는가?, 어찌하여 석탈해는 즉위 8년 후 국호를 서라벌에서 계림으로 고쳤는가? 등등...

또 신라는 건국초기에 어째서 수도인 경주로부터 먼곳부터 가까운 방향으로 백제를 공격했는가?(상식적이지 않죠?... 가까운 곳부터 공략해 가는 것이 정상인데...)

이런 분들의 연구에 만몽화백의 연구가 더해져 설명과 책에 있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답변이 되셨는지요?


다물넷 김종수 드림....


>
>민족사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김산호 선생님의 도서를 모두 탐독하는 이유는, 김산호 선생님의 책 <위사>의 내용기술이 무척 논리적이라는 점이었기 때문인데, 위의 1~3번 항목기술은 매우 비논리적입니다. <위사>에서도 이 부분들을 똑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위사>을 읽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부분이었는데, 그 후에 출간된 <부여백제사>에서도 이에 대한 수정이나 보완없이 그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
>이들에 대한 다른 해석이나 추가적 내용설명을 해주실 분들의 조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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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인 65.110.26.166 2013-09-11  

    드디어 책을 받았습니다. 여러 뜻있는 분들의 노력과 정성이 책의 무게와 부피로 전해졌습니다. 유구한 한민족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고 편집하며 한권의 책으로 만든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기에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이근만 116.39.249.162 2013-07-29  

    답변과 설명 감사합니다. 신라 초기역사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조언이라 생각됩니다. 다시한번 성실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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